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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숲세트(전2권)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일본소설일반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사미디어,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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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노르웨이의 숲 (下)》, 문사미디어(2008).



  “비스킷 통에 여러 가지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는데, 거기엔 좋아하는 것도 있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만 자꾸 먹어버리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거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라고.”


  - pp.206~207. 미도리의 말.


 

  지금 자긴 콜라를 사러 갔고, 나는 그 틈을 이용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벤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긴 나도 처음이야.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자긴 거의 귀담아듣지 않을 거거든. 그렇지?

  있잖아. 자기 알아? 오늘 자기가 내게 몹시 가혹한 행동을 했다는 걸. 자긴 내 헤어스타일이 달라진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지? 난 고생해가며 조금씩 머리를 길러 겨우 지난 주말에야 여자다운 헤어스타일로 바꿀 수 있게 됐다고. 그런데 자긴 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잖아. 제법 예쁘게 되어 오랜만에 자길 만나 놀라게 해주려고 생각했는데 자긴 알아차리지도 못하다니 그건 너무하잖아. 어차피 자긴 내가 오늘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조차 떠올리지 못하겠지? 나도 여자라고. 얼마나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는 몰라도 조금쯤은 나를 제대로 봐줘도 되잖아. 단 한 마디 “그 머리, 예쁜데.”라고만 말해줬어도 그 후에 자기가 아무리 생각에 빠져 있어도, 난 자길 용서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지금, 자기한테 거짓말을 할 거야. 긴자에서 언니와 만날 약속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야. 난 오늘 자기 집에 가서 잘 생각으로 잠옷까지 갖고 왔다고. 그래, 내 가방 속엔 잠옷과 칫솔이 들어 있어. 하하하, 참 어리석기도 하지. 그런데 자긴 자기 집으로 가자는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어. 뭐, 하지만 좋아. 자긴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혼자 있게 해줄게. 열심히 마음껏 생각하고 싶은 걸 생각하라고.


  하지만 난 자기한테만 무턱대고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니야. 난 다만, 다만 외로운 거야. 그렇잖아, 자긴 내게 여러 가지로 친절을 베풀어줬는데, 내가 자기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서 그래. 자긴 언제나 자기 세계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내가 아무리 노크를 해도 잠시 눈만 치켜떠볼 뿐, 금방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것 같아.


  지금 콜라를 손에 든 자기가 막 돌아왔어.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며 걷고 있는 것 같아서 뭔가에 걸려 넘어져 버렸으면, 하고 난 생각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어.


  자긴 지금 내 옆에서 꿀껄꿀꺽 콜라를 마시고 있어. 콜라를 사들고 오면서 “어! 헤어스타일이 바뀌었잖아!” 하고 알아차려주길 기대해봤지만 허사였어. 만일 그래 줬다면 이 따위 편지는 박박 찢어버리고 “자기 집으로 가자. 맛있는 저녁을 지어줄게. 그리고 사이좋게 함께 자자.”라고 말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만 자긴 철판처럼 무신경해. 안녕.


  P. S.

  이 다음에 교실에서 만나도 내게 말 걸지 마.


  - pp.208~210. 귀여운 미도리 ^^



 

  “그 사람과 헤어졌어, 깨끗이.”라고 말하고, 미도리는 말보로를 입에 물더니, 손으로 가려 성냥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셨다.

  “어째서?”


  “어째서?”라고 미도리는 소리를 질렀다. “자기, 머리가 이상한 거 아냐? 영어의 가정법을 알고, 수열數列을 이해하고, 마르크스를 읽을 줄 알면서 왜 그런 걸 모르는 거야? 어째서 그런 걸 묻느냐고? 왜 그런 얘길 여자에게 하게 하느냐고? 그 사람보다 자길 더 좋아하니까 그러는 게 뻔하잖아. 나도 좀 더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고 싶었단 말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자기가 좋아져 버렸으니까.”


  ……(중략)…… 나는 정말 오랜만에 살아 있는 사람과 만난 것 같았다.


  - pp.227~228.



 

  “비 오는 날엔 개미들은 도대체 뭘 하지?”라고 미도리가 물었다.


  - p.233.



 

  넷째로 와타나베는 지금까지 나오코의 버팀목이 되어왔으니, 설령 그녀에게 연인으로서 애정을 품지 않게 된다 해도, 와타나베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많다는 거야. 그러니 모든 걸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정상인과 비정상적인 사람을 다 포함한 총칭이야.)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야. 자로 길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며, 은행 예금처럼 그렇게 융통성 없이 살아나갈 순 없어. 안 그래?

  내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미도리라는 여자는 아주 멋있는 여자인 것 같아. 와타나베가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다는 건 편지만 봐도 잘 알겠어. 그러면서 동시에 나오코에게도 마음이 끌린다는 것도 잘 알겠어. 그런 건 죄도 아무것도 아니야. 이 드넓은 세상에는 흔히 있는 일이거든! 날씨 좋은 날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를 띄우면 호수도 아름답지만 하늘도 아름답다는 것과 다를 게 없어. 그런 식으로 고민하지 마. 내버려둬도 만사는 흘러가야 할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잆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야. 인생이란 그런 거야. 아는 척하는 것 같긴 하지만 와타나베도 그런 인생살이를 슬슬 배울 때가 됐다고 생각해. 와타나베는 때때로 인생을 지나치게 자기 방식으로만 이끌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아.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좀 더 마음을 열고, 인생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맡겨봐. 나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산다는 게 근사하다는 생각을 한다고. 정말이야, 이건! 그러니 와타나베도 더욱더 행복해지라고. 행복해지려는 노력을 해봐.


  물론 나는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해피 엔딩을 맺을 수 없게 된 게 섭섭하긴 해. 하지만 결국 무엇이 좋았는지 그 누가 알 수 있겠어? 그러니 와타나베는 누구도 염려하지 말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행복해지도록 하는 거야. 내가 경험해봐서 하는 말이지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세 번밖에 없고, 놓치면 평생을 후회하게 되거든.


  나는 매일, 들려줄 사람도 없이 기타를 치고 있어. 이것도 왠지 따분한 노릇이야. 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도 싫군. 언젠가 다시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있는 방에서 포도를 먹으며 기타를 치고 싶어.


  그럼 이만.


  - pp.241~242. 이시다 레이코의 편지.



무라카미 하루키(Murakami Haruki) / 소설가
출생 1949년 0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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