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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지키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주최한 심포지엄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 천주교회〉(2010. 10. 15, 명동성당 코스트홀)에 다녀왔다. 최초의 한국인 주교로서 1942년부터 경성대목구장(현 서울대교구장)을 지냈으며 ‘친일’ 논란에도 휩싸여 있는 노기남 대주교(바오로, 1902~1984)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자리였다.

 

  《평화신문》의 표현대로 이 심포지엄은 “지난 해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노기남 대주교를 '친일 행위자'로 규정한 데 대한 한국 천주교의 첫 학술적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각주:1]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들이 맡은 식민지시대 노기남 대주교의 활동에 대한 발표는 ‘친일’ 의혹에 대한 방어이자 변호라는 인상이었다. 이에 반해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속이 아닌 두 사학자의 발표는 훨씬 비판적인 태도로 1945년 이후 노 대주교의 활동을 다뤘기에 대조적이었다.

 

  심포지엄에서는 양인성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이 〈노기남 신부의 경성대목구장 착좌에 대한 연구〉를, 이장우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이 〈식민지시대 말기 조선 천주교회와 총독부의 종교 통제―노기남 주교의 대응을 중심으로〉를 발표했고, 김수자 이화여대 교수가 〈해방 이후 노기남 주교와 반공주의 : 1945~1953〉을, 박태균 교수가 〈한국 현대사 속의 노기남 대주교〉를 발표했다. (심포지엄의 구체적 내용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www.nahnews.net)의 ‘교회중심주의와 반공주의가 낳은 노기남 대주교의 정치’에서 볼 수 있다.)

 

  역시나 이번 심포지엄에서도 ‘친일’, ‘협력’은 논란이 되었고, 이 문제는 나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이장우 연구실장은 발표문에서 기존 연구자들이 대체로 민족주의적 관점이나 당위론, 시비론의 입장에서 노기남 대주교의 활동을 다뤄왔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노기남 대주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기조차 하였다.”면서, “이러한 평가들은 하나같이 ‘민족’을 절대시하여 ‘도덕적 심판의 준거이자 역사적 판단의 잣대’로 삼았던 결과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연구실장은 천주교가 “조선 총독부의 강압적인 강요로 그들의 황국신민화정책에 표면상으로는 충실히 부응할 수밖에 없었지만, 진정한 협력은 아니었으며”,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협력’이 아니라 조선 총독부의 강압적인 강요에 의한 ‘타율적인 협력’이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제국이 “천주교회에 위해를 가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 “교회를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전쟁에 광분하는 제국의 지배를 받는 엄혹한 상황에서 교회 공동체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내가 1930~40년대 일제 치하의 조선인이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겁 많고 현실에 순응하며 사는 편인 나도 살아남기 위해, 나 자신이나 가족, 공동체의 ‘유지 · 발전’을 위해 ‘타율적인 협력’을 하거나 침묵했을 것이 뻔하다. 심지어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기 위해 총독부의 관료가 되거나 군인 · 경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살기 위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일제가 시키는대로 순순히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을 조직했고,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충성을 맹세하며 ‘천주교우 결전대회’를 열고 전승 기원 성체강복식과 대동아전쟁에 관한 강연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살기 위해 ‘타율적인 협력’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나 단체는 제국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뒤에 어떤 행동을 취해야 했을까? 아니면 어떤 처분을 감수해야 했을까? 민족주의에 입각한 새 나라가 들어서고, ‘반민족행위자’를 ‘제대로’ 처벌하고 공민권을 제한하는 법률이 시행되었다면, 그런 협력자들은 해방 이전의 지위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고, 스스로 물러나든지 끌어내려졌을 것이다.

 

  또한 설령 강요에 의한 ‘타율적인 협력’이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1942년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라는 노기남 주교가 다음과 같은 글을 천주교 기관지라는 〈경향잡지〉를 통해 발표했다는 것을 숨기거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기고나서도 투구끈을 졸라매라」는 예전격언은 지금 모든총후국민들의 가슴속에 삭여들바이니 이미 시작된 큰일의 성패는 과거에보다도 장래에 잇슴을 생각하야, 비록 제국의 불패태세가 확립되엇슬지라도 이로서 만족하야 방심하지 말고 오로지 성전목적달성에 정신과 힘을 통채로 밧칠것이다. 이를 위하야는 무엇보다도 당국에서 지도하는바에 무언복종할 것이오, 복종할지라도 마지못하야 하거나 것흐로 하는체만 하거나 하지 말고 진심으로 하여나갈지니 특히 이점에 잇서서 모든 교우들은 다른 이의 모범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 자리에서 “해방이 되었다면 그 추악한 말들을 쏟아내었던 기관지는 입을 닫았어야 했고, 그런 잡지를 묵인 혹은 강요했던 한국천주교회 주교단을 비롯한 구성원들은 스스로 옷을 벗었어야 마땅했다.”는 김유철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각주:2] 그러나 한국 천주교는 그렇게 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다.

 

  또한 여기서 ‘친일’이니 ‘민족반역’이니 하는 골치 아픈 문제는 차치해두고 ‘전쟁’에 대한 태도 문제를 짚어보고 싶다. 오늘날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 역사 인식에 따르면 대량학살과 파괴를 동반한 명백한 침략전쟁이었던 ‘대동아전쟁’을 천주교가 ‘타율적’으로나마 지지하고, 심지어 찬양하며 참전을 독려한 일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몇 가지 질문들이 떠오른다. 강압과 위협에 못 이겨 ‘범죄’에 협력한 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수천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이 전쟁에 협력했던 과거를 인정하고 참회하지 않은 채, 천주교가 ‘주님의 평화’를 말해도 괜찮은 것일까?

 

  한국 천주교는 2000년 12월 대림 첫 주일에 발표한 과거사 반성 문건 ‘쇄신과 화해’를 통해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 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 분리를 이유로 민족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도 타율적으로든 자발적으로든 일제의 전쟁을 찬양하고 협력한 과거에 대한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 천주교는 매 미사 때마다 서로의 평화를 비는 종교로서 “모든 시민과 모든 위정자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진력할 의무가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308항), “전쟁은 “진정한 모든 인도주의의 실패”이며, “언제나 인류에게 좌절을 안겨 주는 것””(간추린 사회 교리, 497항)이라고 가르치고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일본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이케나가 준 대주교는 올해 평화주간을 앞두고 발표한 담화에서 “역사적으로 이처럼 중대한 시기에 일본천주교회의 책임을 포함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이 한국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각주:3] 이에 대한 한국 천주교의 응답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 자세는 가해자로부터 사과를 받는 입장이 아니라 협력자로서 공동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린-안토니오
《갈라진 시대의 기쁜 소식》 952호
(2010. 10. 31)

* 원래의 기고문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1. 〈한국교회사연구소 '노기남대주교 심포지엄'-강압 속 교회 유지 노력〉, 《평화신문》, 2010. 10. 24. [본문으로]
  2. 김유철, 〈‘경향잡지’, 그만하면 호상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09. 11. 15. [본문으로]
  3. 〈일본 주교회의 의장 이케나가 준 대주교, 경술국치 100년 앞두고 평화 기원 담화 발표〉, 《평화신문》, 2010. 7. 2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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