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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굵은 글씨로 강조한 부분은 옮겨 적으며 제가 한 것입니다. 원문과는 관계 없습니다.


극단의 시대(상): 20세기 역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에릭 홉스봄 (까치,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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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히 전쟁의 총력전적인 성격과, 양쪽 편 모두 비용에 상관없이 무제한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려는 결의가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것 없이는 20세기의 더해가는 야수성과 비인간성에 대해서 설명하기가 어렵다. 1914년 이후에 야수성이 계속 상승곡선을 그렸다는 점만큼은 불행히도 전혀 의심할 바 없다. 20세기 초까지는 서유럽 전역에서 고문이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1945년 이후에 우리는 국제연합 회원국들 중 적어도 3분의 1―가장 오래되고 가장 문명화된 몇몇 회원국들을 포함해서―에서 고문이 행해지는 것을 보는 데에 다시 한번 별 반감 없이 익숙해졌다(Peters, 1985).

 

  갈수록 야수화되어간 것은 인간에게 잠재해 있던 잔인성과 폭력성―전쟁이 자연스럽게 정당화한―이 해방된 데에 주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정 유형의 제대군인(퇴역군인)들, 특히 민족주의적 극우파 계열의 폭력배나 살인부대와 ‘자유군단(Free Corps)’에게서 나타났지만 말이다. 직접 살인을 했고 자신의 친구들이 살해당하고 난도질당하는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적이라는 근거가 확실한 자들을 살해하고 잔인하게 다루는 데에 왜 주저하겠는가?

 

  야수화의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전쟁의 기묘한 민주화였다. 민간인들과 민간인들의 생활이 전략의 적절하고 때때로 주된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민주주의 정치에서처럼 민주주의적인 전쟁들에서도 적들이 몹시 가증스럽거나 적어도 경멸할 만한 것으로 보이도록 자연스럽게 악마화되었기 때문에, 총력전은 ‘인민의 전쟁’이 되었다. 양쪽 모두 전문직업인이나 전문가, 특히 비슷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수행된 전쟁은 상호 존중과 규칙의 인정 또는 심지어 기사도까지 배제하지 않는다. 폭력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 관한 장 르누아르의 평화주의적 영화인 “위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이 보여주듯이 양차 세계대전 때 공군의 전투기 조종사들에게서도 여전히 명백하게 나타났다. 정치와 외교의 전문직업인들은 유권자들의 표나 신문들의 요구에 구애받지 않을 때, 싸우러 나오기 전에 악수를 하고 싸우고 난 뒤 함께 술을 마시는 권투선수처럼 상대편에 대해서 아무런 적의 없이 선전포고하거나 강화(講和)를 협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세기의 총력전들은 비스마르크적 유형이나 18세기적 유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중적 국민감정이 동원되는 어떠한 전쟁도 귀족전쟁처럼 제한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 체제의 성격과 동유럽에서의 독일인들―이전에 나치가 아니었던 독일 군대를 포함해서―의 행동이 악마화를 상당 정도 정당화해주었다는 점을 말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전쟁의 새로운 비인격성이었다. 사람을 죽이고 불구로 만드는 일이 스위치를 누르거나 레버를 당기는 원격조작의 결과가 되어버린 것이다. 총검에 의해서 내장이 튀어나온 사람들이나 총구의 가늠쇠를 통해서 본 사람들은 정면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반면, 과학기술은 자신의 희생자들을 보이지 않게 했다. 서부전선의 영구고정된 대포들 맞은편에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통계수치―그나마 미국의 베트남 전쟁 동안 적의 사상자 수인 ‘보디-카운트(body-count)’가 보여주듯이 전혀 현실적인 통계치가 아니라 가설적인 통계치―였다. 폭격기 저 밑에 있는 것은 이제 막 불에 타고 내장이 튀어나오게 될 사람들이 아니라 단순한 표적이었다. 어떠한 시골 임산부의 배도 총검으로 찌를 마음이 없었을 것이 확실한 유순한 청년들에게도 런던이나 베를린에 고성능 폭탄을,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떨어뜨리기는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굶주린 유태인들을 직접 도살장으로 몰아넣는 것이 비위에 맞지 않았을 것이 확실한 근면한 독일 관료들은 자신이 직접 관계한다는 느낌을 덜 가진 채, 폴란드의 집단학살수용소행 죽음의 열차들을 정규적으로 배차하는 철도 시간표를 짤 수 있었다. 우리 세기의 최대의 잔인한 행위는 원격조작과 시스템 및 기계적 절차에 의한 비인격적인 잔인행위―특히 그러한 잔인행위가 유감스럽지만 작전상 필요한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 때―였다.


  - 76~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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