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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락의전이(개역판)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슬라보예 지젝 (인간사랑,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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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 1992년 가을, 내가 미국의 대학에서 히치코크에 대한 강의를 한 직후 청중의 한 명이 나에게 분개하여 질문하였다. 옛 조국이 화염 속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어떻게 당신은 그렇게 하찮은 주제를 말할 수 있는가? 나의 답변은 미국에 있는 당신이 히치코크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왜 그런가였다. 나에게는 희생자와 어울려 행동하고 나의 조국에서의 끔찍한 사건들을 증명할 그 어떤 심적 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행동은 일종의 자기애적 만족--즉, 상황이 나에게 나쁘게 진행될 때 나의 청중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그들의 인식에 대한--의 부정인 동정과 거짓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같이 행동하고 구유고슬라비아에서 전쟁의 공포에 대해서가 아니라 히치코크에 대해서 말하는 순간 침묵의 금지를 위반한다….

 

  이러한 나의 경험은 현재 발칸의 갈등에서 서구의 시선과 관련하여 무엇이 참을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우선 포위되어 공격받는 사라예보로부터 전해진 전형적인 기사를 생각해 보자. 기자들은 보다 혐오감을 일으키는 장면--찢겨진 아동의 몸, 강간당한 여인, 굶어 죽은 죄수--을 발견하려고 서로 경쟁한다. 이러한 모든 것이 굶주린 서구의 눈을 위한 좋은 먹이이다. 그러나 언론매체는 사라예보의 주민들이 어떻게 정상적인 삶의 모습을 절망적으로 유지하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사라예보의 비극은 매일 평상시와 같이 자신의 가게로 걸어가기는 하나 세르비아의 저격수가 가까운 언덕에 잠복해 있기 때문에 걸음을 재촉해야 하는 나이든 점원에게서 요약된다. 우리가 멀리서 폭발음을 들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적 으로' 영업을 하는 디스코 장에서, 연인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이혼을 목적으로 폐허를 뚫고 법원에 가야만 하는 젊은 여인에게서, 1993년 봄, 사라예보에서 매달 상영된 보스니아 영화, 그리고 스콜세지(Scorsege)와 알모도바(Almodovar)에 대해 출판된 에세이의 주제에서 그 비극은 확인된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차이가 아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사라예보에 이국적이고 피에 목마른 '발칸인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다만 우리와 같은 정상적인 시민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와 '그들'을 분리시키는 경계가 그 모든 자의성 속에 드러나고, 우리는 외적 관찰자들의 안전한 거리를 거부하지 않을 수 없다. 뫼비우스의 띠(Moebius Band)에서와 같이 부분과 전체는 일치하므로 '진정한' 평화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와 가능한 한 평화 속에서 살고 있다고 가장하는 사라예보의 주민들 사이에 분명하고 모호하지 않은 분리의 선을 긋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평화를 모방하고 평화의 허구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라예보는 정상성의 바다 안에 있는 섬, 즉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말해진 정상성은 공적 복지 안에 있는 허구의 섬 그 자체이다. 이것은 우리가 희생자에게 오명을 씌움으로써, 즉 희생자를 두 번의 죽음 사이의 손상된 영역에 자리매김함으로써--마치 희생자가 성스러운 환상공간에 제한된 일종의 살아 있는 주검, 즉 천민(pariah)인 것처럼--회피하려는 것이다.

 

 

  -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만우 옮김, 『향락의 전이』, 인간사랑(2001), 20~23쪽.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
출생 1949년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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