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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알베르 카뮈 (책세상,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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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 ‘페스트’라는 말이 이제 막 사람들의 입 밖에 나왔다. 베르나르 리유를 그의 집 창 너머에 앉혀놓고 있는 이야기의 이 대목에서, 서술자가 그 의사의 의아해하고 놀라워하는 심정에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몇몇 뉘앙스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그가 보이고 있는 반응은 우리 대부분의 시민들의 반응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그의 망설임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또한 그가 불안과 믿음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던 것도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래 가지는 않겠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필경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 같은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민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네들 생각만 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즉 그들은 재앙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있었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모엥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딴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겸손할 줄을 몰랐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미래라든가 장소 이동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금지시켜버리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생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의사 리유는 자기 친구 앞에서, 여기저기에서 발생한 수명의 환자들이 아무 예고도 없이 이재 방금 페스트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났으면서도 그에게 있어서 위험은 여전히 현실적으로 믿어지지 않는 상태였다. 다만 직업이 의사인지라 고통에 대한 나름대로의 개념을 가지고 있고 남보다 약간 더 풍부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시가지 풍경을 창문 밖으로 내다보면서 의사는 흔히들 불안이라고 이름 붙이는 미래에 당면하여 가슴속에 가벼운 구토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듯 말 듯했다. 그는 그 병에 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머릿속에서 종합해보려고 애를 썼다. 숫자들이 그의 기억 속에서 뱅뱅 돌았다. 그는 역사상으로 알려진 약 30차에 걸친 대대적인 페스트가 1억에 가까운 인명을 빼앗아갔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억의 사망자가 과연 무엇인지를 알 듯 말 듯해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란 그 죽은 모습을 눈으로 보았을 때에만 실감이 나는 것이어서, 오랜 역사에 걸쳐서 여기저기 산재하는 1억의 시신들은 상상 속의 한 줄기 연기에 불과한 것이다. 의사는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던 페스트의 기억을 더듬었다. 프로코프에 의하면 하루 동안에 1만 명의 희생자가 났다는 것이다. 1만 명의 사망자라면 커다란 영화관을 가득 채운 관중의 다섯 곱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똑똑히 이해를 해보자면 다섯 군데의 극장에서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서, 그들을 시내의 큰 광장으로 데리고 간 다음 모두 죽여서 무더기로 쌓아놓는다는 식으로 상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름 모를 시체들의 더미 위에 낯익은 사람들의 얼굴을 올려놓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실현 불가능한 일이고 또 누가 만 명씩이나 남의 얼굴을 알고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프로코프 같은 사람들이 수를 헤아릴 줄 모른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일이다. 70년 전 중국 관동에서는 재앙이 주민들에게까지 미치기도 전에 4만 마리의 쥐가 페스트에 걸려 죽었었다. 그러나 1871년에는 쥐를 헤아리는 방법이 없었다. 모두들 주먹구구로 대강 계산했고 오차가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렇지만 쥐 한 마리의 길이를 30센티미터로 칠 때 4만 마리를 잇대어 줄을 지어놓는다면…….


-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페스트』, 책세상(2006), 60~63쪽.

 

 

  어쨌든 그러한 종류의 자명한 일 또는 걱정으로 인하여 우리 시민들의 마음속에서 귀양살이의 그리고 생이별 상태의 감정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 점과 관련하여, 서술자는 여기서 예컨대 옛날 이야기에서 나오는 그것처럼 용기를 북돋아주는 영웅이든가 빛나는 행동과 같은, 아주 굉장한 구경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소개할 것이 없으니 얼마나 유감된 일인지 모르겠다. 그 까닭은, 재앙만큼이나 보잘것없는 구경거리는 없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불행은 오래 끌기 때문에 오히려 단조로운 것이다. 그런 나날을 겪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페스트를 겪는 그 무시무시한 나날들이 끝없이 타오르는 잔혹하고 커다란 불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발바닥 밑에 놓이는 모든 것을 짓이겨버리는 끝날 줄 모르는 답보 상태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다. 페스트는 그 병이 유행하던 초기에 의사 리유를 성가시게 따라다녔던, 그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 굉장한 이미지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페스트는 무엇보다도 용의주도하고 빈틈 없으며 그 기능이 순조로운 하나의 행정 사무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 마디 삽입해서 말하자면, 아무것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 서술자는 객관성이라는 것을 고집해왔던 것이다. 서술자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필요성에 관한 것들 이외에 예술적인 효과를 위해서 무엇이건 덧붙이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객관성 자체가 서술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요구한다. 즉, 그 시기의 커다란 고통, 가장 심각한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고통은 바로 생이별의 감정이었으며 페스트의 그 단계에 있어서의 생이별의 감정에 대하여 새로운 기록을 남겨놓는 것이 양심적으로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당시에 있어서 그 고통 자체는 그것의 비장감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시민들, 적어도 그 생이별로 말미암아서 가장 심한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에 길이 들어버렸던 것일까? 꼭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들은 감정의 메마름 때문에 괴로워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페스트의 초기 단계 때는 잃어버린 사람을 뚜렷이 기억할 수 있어서 그들이 없음을 애석해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그 얼굴, 그 웃음, 나중에 생각해보니 비로소 그이가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어느 날의 일, 이런 모든 것들은 뚜렷하게 생각이 나지만, 그런 것을 다시 그려보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또한 그때 이후 그렇게도 먼 곳이 되어버린 그 장소에서, 상대방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상상하기란 대단히 힘들었다. 요컨대 그 시기에, 그에게는 기억력은 있었지만 상상력은 부족했다. 페스트의 제2단계에 접어들자 그들은 기억력조차도 상실해가고 있었다. 그 얼굴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결국은 같은 이야기지만, 그 얼굴에서 살이 없어져 그 얼굴을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알아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페스트가 발생한 처음 몇 주 동안은 사랑을 느끼고 싶어도 이제는 허깨비밖에는 상대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후에는 그들은 추억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미세한 얼굴들마저 잊어버림으로써, 그 허깨비는 전보다 더 살이 빠져버린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 길고 긴 생이별의 세월을 겪고 나자 그들은 둘이서 누리던 그 무르녹은 정분도 이제는 더 이상 상상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또 언제든지 손을 얹어놓을 수 있었던 상대가 어떻게 자기 곁에 살고 있었던가도 더 이상 상상할 수가 없게 되었다.


-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페스트』, 책세상(2006), 244~246쪽.

 


  타루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었다. ‘물론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위협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내가 단언하는 바이지만, 그는 자기도 페스트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는 이런 생각(아주 어리석은 생각도 아니지만), 어떤 큰 병 또는 심각한 번민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그와 동시에 다른 모든 병과 번민을 면제받는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는 성싶었다. “가만히 살펴보면” 하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사람은 여러 가지 병을 한꺼번에 앓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가령, 선생이 중증의 암이라든가 심한 폐병이라든가 하는 위중하고도 불치의 병을 앓는다고 가정해보십시다. 선생은 절대로 페스트나 장질부사에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안 될 말입니다. 사실은 그 정도가 아녜요. 왜냐하면 암 환자가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은 보신 적이 없으실 테니까 말이에요.” 사실이건 아니건, 그런 생각이 코타르를 아주 명랑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그가 원하지 않는 단 한가지 일은 딴 사람들과 헤어져 있는 일이다. 그는 혼자서 죄수가 되어 있느니보다는 모든 사람과 함께 포위당해 있는 편을 더 좋아한다. 페스트와 함께 있으면 내사(內査)고, 서류고, 카드고, 수수께끼 같은 심리고, 목전에 닥친 체포 같은 것도 있을 수 없다. 알기 쉽게 말하면, 이제는 경찰도 없고 묵은 혹은 새로운 범죄도 없고 죄인이라는 것도 없다. 다만 있는 것은 특사 중에서도 가장 자유재량적인 특사를 기다리고 있는 죄수들뿐이며, 그들 중에는 경찰관 자신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처럼, 역시 타루의 주석에 의하면, 코타르는 시민들이 나타내고 있는 고통과 혼란의 징조를, ‘계속 떠들어보십시오. 나는 먼저 다 겪고 났으니까요.’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너그럽고 이해성 있는 만족감을 가지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페스트』, 책세상(2006), 263~264쪽. 



  붉은 옷을 입은, 호인도 못 되고 다정한 사람도 못 되는 아버지의 입에서는 굉장한 말들이 우글거리고 있다가 마치 뱀처럼 줄을 이어 튀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아버지가 사회의 이름 아래 그 남자의 죽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심지어는 그 남자의 목을 자르라고 요구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사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어요. ‘그의 목은 마땅히 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게 그거 아니겠어요? 결국 아버지는 그 남자의 목을 차지하게 되셨으니까요. 다만 그때 하수인이 아버지가 아니었을 뿐이지요. 그리고 그후, 나는 특히 이 사건만은 결론이 날 때까지 방청을 했는데, 나는 그 불행한 남자에 대해서, 아버지는 도저히 느껴보지도 못하실 아찔할 만큼의 친밀감을 느꼈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관례에 의해서, 사람들이 정중하게 소위 최후의 순간이라고 부르는 것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비열한 살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철도 여행 안내》만 보아도 끔찍해서 구역질이 났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법이니 사형선고니 형의 집행이니 하는 것에 대해 혐오감과 함께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벌써 몇 차례나 그러한 살인 현장에 입회했었고, 그리고 그가 아침 일찍 일어나는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그런 경우엔 자명종을 틀어놓곤 했습니다. 나는 감히 그런 말을 어머니에게 하지는 못했지만, 어머니를 더 주의해서 관찰했어요. 그리고 내가 알아낸 것은, 그 부부 사이에는 이제는 아무것도 없고, 어머니는 그저 체념의 생활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으로 어머니는 용서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그런 식으로 말을 했었죠. 후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용서받아야 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할 때까지 내내 가난에 시달렸고 가난이 그에게 체념을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페스트』, 책세상(2006), 332~333쪽.



  여전히 코타르에 관한 관찰 속에 뒤섞인 채, 수첩 속에는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는 수많은 고찰이 발견되었는데, 그중의 어떤 것들은 이제는 회복기에 들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일을 시작한 그랑에 관한 것이며, 또 어떤 것들은 의사 리유의 모친을 묘사한 것들이었다. 한 집에 살고 있던 관계로 그 여인과 타루 사이에 있었던 얼마간의 대화와 그 늙은 부인의 태도, 미소, 페스트에 대하여 그녀가 한 말 같은 것들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타루는 특히 리유 부인의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려는 태도, 모든 것을 단순한 말로 표현하는 그 솜씨, 고요한 거리로 난 창문을 특히 좋아해서 저녁 때가 되면 그 창 앞에 약간 몸을 꼿꼿이 세우고 두 손을 가만히 놓은 채 주의 깊은 시선으로, 황혼이 방안으로 가득히 들어와 부인의 자태를 잿빛의 광선 속에 하나의 그림자로 만들었다가, 그 잿빛의 광선이 차차 짙어지면서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를 녹여버릴 때까지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갈 때의 유연한 동작, 타루 앞에서는 한 번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 적이 없기는 하나 부인의 행동이나 언사에서 그런 빛을 알아볼 수 있는 선량함, 끝으로 타루에 의하건대 부인은 언제나 생각하지 않고서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며 그처럼 고요하게 어둠 속에 묻혀 있으면서도 그 어떤 광선과도, 심지어는 그것이 페스트의 광선이었을 경우에라도, 떳떳이 어깨를 펴고 겨루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 같은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었다. ……(후략)……


-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페스트』, 책세상(2006), 367~368쪽.



  그후의 밤은 투쟁의 밤이 아니라 침묵의 밤이었다. 세계로부터 단절된 그 방에서, 이제는 옷을 얌전히 입은 시신을 굽어보며 리유는 벌써 여러 날 전, 발 아래 페스트가 아우성치는 테라스 위에서, 시의 문이 습격당한 직후에 느꼈던 그때의 정적이 떠도는 것을 의식했다. 그는 그때에도 이미, 그냥 죽게 내버려두고 온 사람들의 침대에 감돌고 있던 그 침묵을 생각했었다. 그것은 어디서나 똑같은 휴지부였으며, 똑같이 장엄한 막간이었고, 전투 뒤에 언제나 찾아오는 똑같은 진정 상태였다. 그것은 패배의 침묵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친구를 에워싸고 있는 침묵으로 말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진하고 페스트에서 해방된 도시와 거리의 침묵과 너무나도 긴밀하게 일치하는 침묵이었기 때문에, 리유는 이번이야말로 정말 결정적인 패배, 전쟁을 종식시키면서 평화 그 자체를 치유할 길 없는 고통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패배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의사는 결국 타루가 평화를 다시 찾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 그는 자기 자신에게 다시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 또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라든지 친구의 시체를 묻어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다시는 휴전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페스트』, 책세상(2006), 384~385쪽.



  그는 페스트가 번지던 초기의 자기 자신, 단숨에 그 도시를 탈출해서 사랑하는 그 사람을 만나러 날아가고 싶었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변했다. 페스트는 그의 마음 속에 방심이라는 것을 불어넣어주었던 것이다. 그는 방심을 전력을 다해서 부정하려 했지만, 그것은 마치 막연한 불안과도 같이 그의 마음속에 계속 살아 남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페스트가 너무나 별안간에 끝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는 얼떨떨했다. 행복은 전속력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일들은 기대하고 있던 것보다 더 리 진행되고 있었다. 랑베르는 모든 일이 일순간에 복구될 것이고, 기쁨은 음미해볼 겨를도 없이 닥쳐온 불지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결국 랑베르와 마찬가지였으므로 그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제각기 각자의 개인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 그 플랫폼에서, 그들은 아직도 자기들의 공통성을 느끼면서 서로 눈짓과 미소를 교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차의 연기를 보자마자, 그들 귀양살이의 감정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기쁨의 소나기에 휩싸여 갑자기 꺼져버리는 것이었다. 기차가 멈춰 섰을 때, 서로의 팔이 이제는 그 모습조차 아물아물하게 되어 있던 몸과 몸 위로 희색이 만면해서 탐욕스럽게 휘감기는 순간, 대개는 바로 같은 플랫폼에서 시작되었던 그 끝없는 이별은 같은 곳에서 순식간에 종말을 고했다. 랑베르 자신은 자기를 향해서 달려오는 그 모습을 미처 볼 겨를도 없었는데, 그 여자는 벌써 그의 품안에 뛰어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품안에 가득 껴안은 채, 정다운 머리털밖에는 안 보이는 그 머리를 꼭 끌어당기고, 현재의 고통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너무나 오랫동안 억눌러 참았던 고통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그 눈물로 인해서 지금 자기의 어깨에 파묻혀 있는 그 얼굴이 과연 자기가 그렇게 꿈에도 잊지 못하던 얼굴인지, 아니면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의 얼굴인지를 확인해볼 수는 없다는 데에 적이 안심하고 있었다. 좀 있으면 자기의 의심이 참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당장에는 그도 자기 주위의 사람들처럼, 페스트가 오든지 가든지 사람의 마음은 조금도 변할 것이 없다고 믿고 싶었다.


  그들은 모두 서로를 꼭 껴안고 자기들 밖의 세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이, 겉으로는 페스트에 승리한 듯한 얼굴로, 모든 비참함과, 그리고 역시 같은 기차를 타고 왔지만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서야 그 오랜 동안의 무소식이 그들 마음속에 빚어놓았던 두려움을 현실로 확인해야만 하는 그런 사람들을 잊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 잊혀진 사람들, 이제 동반자라고는 아주 생생한 고통밖에는 없게 된 사람들, 또 그 순간 사라져간 사람의 추억에 골몰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서, 이별의 슬픔은 절정에 달했다. 이름도 없는 구덩이에 허망하게 묻혀버렸거나, 또는 잿더미 속에서 녹아 없어진 사람과 더불어 모든 기쁨을 잃어버린 어머니들, 배우자들, 애인들에게 페스트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그같은 고독을 생각해주겠는가? 정오가 되자, 태양은 아침부터 대기 속에서 싸우고 있던 찬바람을 정복하고, 끊임없이 강렬한 햇빛의 물결을 온 시가에 쏟아 붓고 있었다. 낮은 정지되어 있었다. 산 언덕 꼭대기에 있는 요새의 대포들은 움직이지 않는 하늘에 끊임없이 포성을 울리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밖으로 쏟아져 나와서, 고통의 시간은 종말을 고했지만 망각의 시간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고 있는 그 벅찬 순간을 축복하고 있었다.


-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페스트』, 책세상(2006), 391~393쪽.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 소설가
출생 1913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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